호시 신이치의 초단편SF '쇼트-쇼트'
지식여행 출판사의 '플라시보' 시리즈

‘쇼트-쇼트’로 일본SF의 독보적 경지를 이루다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지식여행’ 출판사)
수많은 일본 소설들이 나와있고 장르나 작가의 비중이나 개별 작품의 수준 등이 천차만별이라 옥석을 가릴 안목이 모자란 독자로서는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런 접근은 어떨까? 그 모든 일본 작가들, 아마 한 명도 빠짐없이 100%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작가의 작품을 골라보는 것은?
현대 일본 대중문학사에서, 특히 SF문학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이름, 바로 ‘쇼트-쇼트(short-short)’의 대가 호시 신이치가 그런 작가이다.
쇼트-쇼트란 원고지 10매 안팎의 아주 짧은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꽁트보다 더 짧은, ‘마이크로픽션’ 혹은 장편(掌篇)에 해당하는 형식이다. 호시 신이치는 1997년에 작고할 때까지 그런 쇼트-쇼트를 1,000편 이상 썼다.
그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무척 오래전의 기억이다. 올드 SF팬이라면 추억에 젖을 이름 ‘아이디어회관 SF전집’에서 와다 마코토의 일러스트와 함께 접했던 그의 초단편들은 당시 초등생이었던 필자에게도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잊을 만하면 번역서가 나오곤 했는데, 솔직히 성인이 된 다음에는 평가절하를 하기도 했었다. ‘뭐 아주 짧으니까 부담 없이 보는 거지, 아이디어에 깊은 통찰이 담겼다기보다는 그냥 기발함뿐이잖아’ 정도의 느낌이었다. 일본에선 전집이 출간되고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하지만 잘 납득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전집들을 하나씩 보면서, 그동안 내 선입감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그동안 번역된 그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정말 짧은 작품들만 선별적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플라시보' 시리즈에서 국내에 처음 선을 보인 그의 작품들 중에는 길이도 쇼트-쇼트보다 꽤 길고 아이디어도 단순한 발상 차원을 넘어 상당한 사색을 담은 모던판타지, 혹은 사회학적 추론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고 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이를테면 단순한 강도 모의가 어떻게 해서 국가 전복의 쿠데타 음모로 발전하는지, 행복한 결혼을 앞둔 청년이 왜 인류 역사의 모든 비극을 끌어안고 괴로워해야 하는지 등등. 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 사회와 제도의 온갖 허점들 사이에서 가련한 운명의 나락으로 빠지고 마는 이야기들이 많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선 주인공에게는 오 헨리식의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해피엔딩조차 주어지지 않는데, 이런 냉정하고 담담한 입장은 예전에 호시 신이치에게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면모이다.
그래도 어느 독자는 말할 것이다. 역시 남는 건 그다지 없지 않냐고. 더 나아가서 이런 의문도 들 법 하다. 혹시 일본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그 경박단소함의 형성에 혹시 호시 신이치같은 작가가 상당 부분 기여한 건 아닐지?
아마도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야기가 너무 짧아서일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세밀한 감정이나 상황 묘사는 없이 오로지 아이디어에 따른 스토리만 요약한 것이기에, 독자가 깊이 감정이입을 할 여지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언급처럼 모든 군더더기를 뺀 소설은 단편 형식이면 충분하다는 말이 호시 신이치에게도 적용되지 않을까? 보르헤스의 정수가 근원적인 통찰이라면 호시 신이치의 미덕은 그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인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