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SF명작 다이제스트

<중력의 임무 Mission of Gravity>
* 줄거리
납작한 쟁반처럼 생긴 메스클린은 백조자리 61번 별의 둘레를 도는 행성으로서, 직경이 크고 밀도가 아주 높으며 하루가 겨우 17분 남짓에 불과할 만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
이처럼 특이한 조건때문에 메스클린의 지표면 환경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양상. 적도 지방의 중력은 원심력때문에 지구의 3배 정도에 지나지않는 반면 극지방에선 무려 700배 가까이에 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혹독한 환경에도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지면에 착 달라붙은 납작한 외모를 지녔으며 강한 중력에 버틸 수 있도록 무척이나 단단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도 '높이'라는 것 자체를 매우 두려워하는데, 강력한 중력때문에 위치에너지가 너무나도 커서 단지 몇 센티미터만 추락해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메스클린의 무시무시한 중력은 그들을 사실상 2차원의 삶에 붙들어 매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메스클린인들은 나름대로 사회를 형성했으며 심지어 멀리 떨어진 부족들끼리 왕래를 통한 교역도 행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발리넌은 바로 메스클린의 한 무역선 선장으로서, 진취적이고 독립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발리넌의 무역선은 어느날 외계에서 날아 온 우주선과 접촉하고, 그 안에 타고있던 외계인들과 만난다. 그 외계인들이란 바로 지구인이다.
지구인들은 메스클린 행성의 극지 부근에 추락해버린 무인 우주탐사선을 회수하러 온 것이었다. 그 탐사선에 수록된 데이타들을 분석하면 반중력장치의 개발이 가능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기필코 그 탐사선을 회수해야만 했다.
찰스 래클랜드라는 사람이 지구를 대표해서 메스클린인들과 계속 의사소통을 진행시켰다. 발리넌과 래클랜드는 시일이 지나면서 점점 우정을 싹틔우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래클랜드는 발리넌을 진지하게 설득한다.
'당신네 행성의 극지 지역은 이제껏 우리가 다녀 본 우주의 그 어떤 곳보다도 중력이 강합니다. 우리는 그곳의 중력 데이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정보의 가치는 우리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에게도 매우 큰 것입니다. 당신들의 과학과 문명이 획기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발리넌은 생각에 잠긴 끝에 지구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을 위해서 이 위험한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메스클린의 극지 지역은 중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도저히 지구인들은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극지로의 모험이 시작되면서 발리넌은 점점 과학의 효용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고, 결국은 과학이 자신들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바다와 산을 번갈아 넘어가면서 그들은 극지에 점점 접근하지만, 한 번도 답파한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과 혹독한 자연환경들, 그리고 괴물이나 다른 적대적인 종족들이 계속 나타나는 바람에 험난한 고생을 겪는다. 특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그들에겐 금단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지구인들의 조언으로 도르래를 만들고 밧줄을 연결하여 과감하게 건너가는데 성공한다.
지구인 래클랜드는 그들과 동행하여 여정을 함께하다가 극지에 가까워지자 발리넌 일행을 떠나고 만다. 갑옷과 같은 특수 중력감압복으로도 도저히 막대한 중력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메스클린 상공의 우주선으로 올라가 무선 통신을 통해 추락한 탐사선의 위치를 발리넌 일행에게 계속 알려준다.
마침내 무인탐사선이 발견되자, 발리넌은 그 잔해를 지구인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한다. 그들 스스로 그 탐사선을 분석하여 뭔가 획기적인 과학 지식을 한꺼번에 획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래클랜드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이 얻으려는 과학 지식이 얼마나 방대하고 복잡한 체계인지를 깨닫는다. 그들은 마치 원시인이 로켓을 가지면 이내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발리넌은 지구인들에게 과학 레슨을 받기 시작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들 스스로 과학적 사고방식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리나서 얼마 뒤, 그들이 이제껏 타고 왔던 배는 거대한 기구에 매달려 하늘로 떠오른다. 이제 그들은 3차원의 세계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어간 것이다.
* 작가에 대해
할 클레멘트(Hal Clement:1922 - 2003)
과학적 논리 전개의 정연함과 묘사의 치밀함에 특히 중점을 두는 과학소설을 '하드(hard)SF'라고 한다. 흔히 하드SF의 대가로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 작가인 아서 클라크를 꼽지만, 사실 할 클레멘트는 이 분야에서 클라크를 능가하는 찬사를 받곤 한다.
하버드대학에서 천문학을 공부한 클레멘트는 전업작가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대학졸업 뒤 공군에서 비행기 조종사로 복무하고는 그 이후로 주욱 고등학교 과학교사로 일하며 여가시간에 틈틈이 소설을 썼다. 그러나 해박한 과학지식의 연역을 통해 이질적인 외계와 외계인을 설정하는 데에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며 당대의 기라성같은 1급 SF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했던 탁월한 인물이었다.
본명이 해리 클레멘트 스텁스인 할 클레멘트는 192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섬머빌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열성적인 SF팬이었던 그는 1945년 6월, SF잡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픽션>에 단편 <증거>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등단한다. 2차 대전중 캐나다에서 B-24 초계기의 파일럿으로 복무하느라 작품활동에 공백이 있었지만 종전 후에 곧 SF잡지의 주요 작가로 돌아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53년에 발표한 <아이스월드>를 통해서였다. 범죄자를 쫓아 우주인 수사관이 혹독한 환경의 외계 행성으로 오는데, 원래 그들의 신체는 규소를 기본으로 하는 신진대사 시스템을 지니고 있으며 고향 행성은 대기 온도가 무려 섭씨 400여도나 되는 초고온의 세계이다. 그러나 수사관과 범죄자의 추격전 무대인 외계 행성은 유황도 얼어붙는 혹한의 세계, 다름아닌 지구였다.
이처럼 외계인의 시각에서 지구를 철저하게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로 묘사해낸 클레멘트는 곧이어 발표한 <중력의 임무>로 부동의 명성을 굳히게 된다.
사실 클레멘트는 50년대 이후 SF계의 조류 변화와 쟁쟁한 후배 작가들의 등장으로 더이상 예전과 같은 명성은 누리지 못했지만, 하드SF의 대가로서 그의 선구적 위상은 변함이 없다. 80년대에는 물리학이나 천문학 교수이면서 SF소설도 쓰는 사람이 늘어나서 예를 들면 로버트 포워드같은 작가는 클레멘트를 능가한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포워드는 장편 <용의 알>에서 중성자성에 사는 지적 생명체를 묘사했다.) 그러나 과학교사라는 직업에 충실한 사람답게 고급 지적 유희로서의 하드SF 창작을 그만큼 발군의 실력으로 이룩한 사람은 달리 유례가 없다. 그 점에서 할 클레멘트의 공로는 길이 기억될 것이다.
* 작품에 대해
이 작품의 무대인 메스클린 행성은 백조자리 61번 별의 둘레를 도는 천체로 설정되어 있다. 실제로 천문학자들의 관측에 따르면 이 별의 둘레엔 목성보다 몇 십 배나 무거운 행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항성의 움직임을 일정기간 관찰해보면 다른 무거운 천체의 질량에 영향받고 있음이 나타난다), 작가 클레멘트는 바로 이 사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나름대로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소설 속의 메스클린은 질량이 목성의 16배 정도이며, 표면의 중력가속도는 지구의 몇 백 배나 된다. 하지만 자전주기가 겨우 17분 45초에 불과해서 그 무시무시한 원심력이 행성의 모양을 납작하게 만들어놓았다. 사실 거대한 가스체인 목성도 천체망원경으로 관측하면 약간 짜부러진 모양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목성의 지름은 지구의 11배가 넘는 반면 자전속도는 겨우 10시간 남짓으로 지구의 절반도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전 속도가 빠르면 천체의 모양이 납작해진다는 설정은 전혀 무리한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강력한 원심력때문에 메스클린의 적도 지방은 중력이 지구의 3배 정도로 떨어진다.
고농도에 고압의 수소대기와 메탄의 바다로 뒤덮인 메스클린은 기온이 섭씨 170도에 달하지만 이 수소대기를 호흡하며 메탄과 암모니아로 생체의 신진대사 활동을 하는 존재가 바로 메스클린인이다. 외모가 마치 가위손이 달린 지네와 비슷한 이들은 나름대로 사회와 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자기들의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짙은 대기에 굴절된 시야때문에 그저 거대한 웅덩이의 바닥에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 자신들의 행성이 거대한 편구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뒤의 반향은 대단했다. 철저한 하드SF적 설정에 독자들의 감탄과 찬사가 쏟아져 클레멘트는 순식간에 당대를 대표하는 SF작가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메스클린인들의 정신적 의식구조가 너무나 지구인들과 같다는 비판도 제기되었고, 또 메스클린 행성의 물리적 설정에도 허점이 있다는 의견 역시 나왔다.
사실 클레멘트 본인도 그러한 문제제기를 반기는 편이었다. 그는 과학교사답게 과학퍼즐처럼 생각해 볼 계기를 제공한다는 사실 자체를 즐긴 것이다.
이후 클레멘트는 <중력의 임무>와 같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장편을 두 편 더 내놓았고 1990년대에 들어서도 같은 배경을 채택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중력의 임무>의 첫 한국어판은 1996년에 시공사에서 나왔다. 이 책에는 작가 자신이 직접 덧붙인 후기가 함께 실려 있어 작품의 하드SF적 이해에 도움을 주며, 또 번역자 역시 자연과학도 출신이라서 새롭게 독자적인 지적을 더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