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일본 SF 다이어리

니헤이 츠토무의 <아바라>
- 독보적인 하드SF의 경지
니헤이 츠토무를 아는가, 모르는가.
나는 이것이 ‘진짜배기’ SF 만화 팬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고 믿는다.
혹시 작가 이름이 생소하다면, 작품 제목들은 이렇다. <블레임!>, <바이오메가>, <아바라>, <시도니아의 기사>, <인형의 나라>….
‘만화 한 컷 한 컷을 그대로 오려내어 액자에 넣고 싶다!’
니헤이 츠토무를 처음 접했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림 때문만은 아니다.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무시무시한 하드보일드 스타일, 그리고 특히 하드한 설정의 디테일까지. 겉으로 드러난 그림 이면에 쉽게 가늠이 안 되는 거대한 컨텍스트가 느껴졌다. 그 강렬한 아우라는 가벼운 독서가 아닌 진지한 심미자의 자세를 요구할 정도였다. 단 한 컷만을 놓고도 오래오래 쳐다보며 배경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음미할 수 있는 작가.
출세작이자 초기의 대표작인 <블레임!>은 전 10권(현재는 신장판 6권)의 적지 않은 분량에다 설정이 복잡하고 대사도 거의 없어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꽤나 힘들다. 니헤이 츠토무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2권으로 완결되는 <아바라>가 입문용으로 적절하다. 그나마 덜 불친절하면서도 작가의 초기 스타일이 집약된 농축액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림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밀도나 하드보일드 액션, 깨알 같은 디테일이 모두 살아있다. 그 다음 작품인 <바이오메가> 중간에서부터 그림체가 변하더니 최근작인 <시도니아의 기사>나 <인형의 나라>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사람에 따라 호오가 갈린다고 하는데, 이미 작가의 광팬이 되어 버린 필자로서는 아무래도 좋다. 이 작가는 그림 못지않게 디테일한 설정과 스토리텔링의 매력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니헤이 츠토무 작화의 특징은 단연 배경의 압도적인 묘사에 있다. 건축설계사 출신답게 거대 구조체나 건축물의 데생이 장인의 경지이다. 작가 자신도 인물보다 배경 작업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는데, 아마도 작품들마다 내뿜고 있는 그 고밀도의 카리스마는 배경의 디테일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그의 작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같은 설정, 같은 서사의 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당히 먼 미래. 인류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의해 존립이 위태롭다. 외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괴생명체는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일단 발현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다. 마치 기생체처럼 사람 몸에 들어가 잠복해있기도 하는 이 괴생명체의 정체나 의도는 오리무중이다. 주인공은 이에 대적하여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다.’
이러한 기본 얼개가 <블레임!>이나 <아바라>뿐만 아니라 <바이오메가>, 그리고 최근작인 <시도니아의 기사>와 <인형의 나라>에도 사실상 반복된다. 그냥 상투적인 영웅담 플롯처럼 보이지만, 이 작가의 작품들은 만화라는 시각 매체의 장점이 최고도로 구현된 스토리텔링 아트워크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가 서양 문화권에서도 열광적인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이유는 SF미학의 시각적 탐색이라는 면으로 볼 때 세계SF 만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블코믹스에서 그를 초빙하여 ‘울버린’ 작업을 맡긴 것도 그런 연유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들은 불친절하다. 독자들이 이미 SF라는 장르에 익숙하다는 것을 전제로 다짜고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그 관문을 잘 넘기면 그때부터 니헤이 츠토무의 기묘한 마력이 시작된다. 인간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들끼리 냉혹하기 짝이 없는 액션들을 펼치는 암울한 미래를 끝없이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SF 만화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고픈 독자라면, 꼭 니헤이 츠토무에 도전해보시기 바란다. 주저 없이 ‘SF 만화의 미래’라고 부를 수 있는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