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제마 선생님?"
가만가만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마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성이었다.
"피곤하셨나 봐요."
제마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눈만 비비고 일어난다.
그녀의 한쪽 눈에 쌍꺼풀이 졌다 사라지는 걸 진성은 놓치지 않았다.
맥주 두 캔과 복숭아 통조림, 육포, 그리고 커피.
제마는 말없이 물건들의 바코드를 찍는다.
"약소하지만."
물건이 담긴 봉투를 건네자 그는 그 속에서 커피를 꺼내 그녀 앞에 두었다.
"응원의 뜻으로요."
제마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힘내세요."
제마는 가볍게 목례로 답한다.
"내일 도서관에서 봐요."
그는 제마를 보고 씩 웃어 보이더니 편의점을 나갔다.
제마는 그가 사라진 문과 자기 앞의 커피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 문 가까이 서 있는 기둥에 붙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참 다른 사람이다.'
많이 어려 보이는데, 형편이 어려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나보다고 진성은 생각했다.
아는 얼굴이면 아는 척을 해주었을 법도 한데, 그녀가 내내 무심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사는 게 힘들었나보다고 생각했다.
'밥이나 한번 같이 먹을까?'
성실히 일하는 근로 청년에게 밥 한 끼 사준다고 무슨 큰일이 나지는 않으리라.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잠깐이나마 제마에게 베풀 호의로 기분 좋아서 웃음이 만개했던 그의 얼굴이 정색이 되었다.
쉽게 받지 못해 액정에 뜬 이름을 한참 내려다보던 그.
"...네."
아버지였다.
"...네."
대답을 하면 할수록 진성은 점점 인상파가 되어갔다.
"아니오. 저 괜찮습니다."
잠시 귀에서 전화기를 뗐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고 다시 전화기를 귀에 댔다.
"네."
가슴이 답답해 왔다.
'아버지, 저 그동안 아버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입술과는 달리 다른 말이 그이 가슴에서 울리고 있었다.
"네, 다 괜찮습니다. "
그는 가만가만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면 나중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줄 거라고.'
진성은 다시 또 가만가만 한숨을 내리 쉬었다.
"네, 염려 마세요. "
'아버지, 저 그만 놔두세요.'
그의 낯빛이 차츰 붉어졌다.
'이제 저 그만 놔두시고, 형님들께 잘해주세요.'
마음속의 말을 꺼내느라 한동안 말이 없던 그.
[진성아]
아버지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는 뭐라 더 할 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 보건소에 온 뒤에도 아버지는 끊임없이 전화로 그를 힘들게 했다.
다시 돌아오라는 것.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라는 요구.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나고 자란 그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아버지가 세워놓은 왕국에서 그가 만든 자리를 지키라는 것은 곧 형님들과의 대결을 뜻했다.
진성은 그럴 뜻이 전혀 없었다.
진성은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청소년기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영혼 없이 사는 그의 형들과 다른 사람들도 차례차례 떠올렸다.
그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살기가 팍팍해도 눈빛만은 맑은 사람들과 그렇게 단순하고 순박하게 살고 싶었다.
"네, 아버지. 네.... 건강하시고요..."
진성은 통화가 끊긴 액정을 확인하고 다시 길게 한숨을 내리 쉬었다.
풍족했지만, 정이 없던 가족들과 썰렁한 기운이 감도는 그의 저택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를 맞는 것은 그 큰 저택에서 내리누르는 중압감과 썰렁함, 그리고 외로움이었다.
방황이 오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나중의 자유를 빌미로 공부하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법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고교 내내 문과에서 공부했으면서 의대에 들어간 건 일종의 반항이었다.
절대로 아버지의 뜻대로는 안 살 거라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일련의 과정이 끝나갈 즈음 의사면허증을 취득한 직후, 진성은 가족들 몰래 '국경없는의사회'에 가입했다.
'아버지, 나를 당신 곁에 묶어 두시려는 건 욕심이세요...'
편의점 봉지를 손에 든 채 그는 맥주 한 캔을 따 마시며 관사로 걸었다.
장기 의료봉사를 하러 가고자 했던 진성의 계획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집안 식구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가 먼저 수령했어야 할 '국경없는의사회'의 웰컴 레터가 집사의 손을 거쳐 아버지에게로 건너갔던 것이다.
"아이고, 의사 선생님. 오늘 또 산책 다녀오세요?"
관리 아저씨였다.
"네. 아저씨 이거 좀 드세요."
진성은 그에게 복숭아 통조림을 건넸다.
"아이고, 매번 뭘 이런걸."
그의 얼굴에 황송한 빛과 함께 미묘한 아쉬움이 깃들었다.
진성은 그만 씩 웃어버렸다.
"담배 사 오려다가 아저씨 건강 생각하니 안 되겠더라고요."
그의 말에 관리 아저씨는 귓불이 빨개졌다.
"예, 잘 먹겠습니다."
관리 아저씨의 모습에 진성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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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그랑~.
어이구, 그러면 그렇지.
"미안..."
언니의 무안한 낯빛에도 나는 변함없이 언니를 째려보았다.
"왜 자꾸 고양이 밥통이 여기 있을까?"
또 저 소리다.
"하~. 씻어야 되는데...."
그러더니 씻지도 않고 언니는 잠이 들었다.
저렇게 씻지도 않고, 아침 일찍 남의 단잠을 깨워놓고 씨익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언니에게 다가가 얼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음…. 음...."
언니는 눈도 뜨지 않고 한 손으로 나를 쓰다듬었다.
"...음…. 괜찮아, 괜찮아...."
언니가 목 부분을 가만가만 쓰다듬자 나도 가르릉 소리를 냈다.
"넌…. 내가... 살려줄게...."
나를 쓰다듬던 언니의 손이 천천히 멈췄다.
나는 그렇게 언니의 손을 등에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언니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나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1년 전, 내가 있던 풀숲을 우연히 찾아든 언니였다.
3년 동안 방안에 지내면서 제마의 소망은 단 하루 햇빛을 보는 것이었다.
햇빛을 보는 그날, 자신은 죽을 거라고.
그리고 햇빛이 보고 싶어 미쳐가던 그 날.
제마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던 그 방을 나왔다.
그리고 버스를 오래 탔다.
입은 옷 그대로.
표를 사고 남은 몇백 원이 주머니 전부였던 그대로.
햇빛이 가장 강한 오후에
제마는 인적이 드문 풀숲으로 걸어들어왔다.
몇백 원이 든 주머니 반대편 주머니에는 커터 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그녀는 그 나이프를 꺼냈다.
끼기기긱-.
친숙하고 반가운 소리였다.
그녀의 손목에는 이미 여러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새로이 그어질 그들의 친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제마는 손목에 난 자국을 보다가 그 자국 그대로 나이프를 대었다.
피가 흘렀다.
익숙한 아픔이 느껴졌다.
아직 깊이 찌르지 않았다.
그건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동안의 외로움과 받아왔던 고통에 대한 복수...
그녀가 더 깊숙이 찌르기 위해 나이프를 댔던 바로 그때였다.
"야아아오오옹..."
미약한 소리였다.
"야아아…. 아옹..."
제마는 나이프와 피와 베인 상처에서 오는 아픔 따위를 깡그리 잊은 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야아아오옹..."
그때 제마는 자신이 방금 하려고 했던 그 일을 잊을 만큼 솟아나는 감정을 느꼈다.
"야아아아아오오옹...."
그것은 호기심이었다.
너무나도 미약한 이 고양이 울음소리의 주인을 찾는 것.
그리고 일어났다.
커터 나이프가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서 피가 떨어졌다.
뚝. 뚝
그리고 풀섶에 묻혀버린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눈마저 감은 채 힘없이 누워있는 새끼 고양이를.
이제 그 고양이의 우는 소리마저 잦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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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점점 더 더워지고 있었다.
몸에서 털이 더욱더 빠졌다.
언니는 자면서도 재채기를 해댔다.
나는 현관 앞 러그에다 몸을 이리저리 비벼댔다.
털은 빠지고, 몸은 간지러웠다.
-그만 일어나라고.
내가 아무리 야옹대도 언니는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내가 알람보다 더 정확한데도 말이다.
-일어나!
언니는 한쪽은 감고 한쪽 눈마저 반은 감은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베던 베개를 냅다 내 쪽으로 던졌다.
캬아아오!
"자게 둬! 알람도 안 울렸어."
그렇게 말하며 언니가 돌아눕자 약속이나 한 듯이 알람이 울렸다.
"타이밍 참..."
나는 언니에게 뛰어올랐다.
"왜?"
한쪽 발로 얼굴을 톡톡 건드리자, 언니는 누웠던 고개를 들었다.
한숨이 입에서 삐져나왔다.
사실 별 뜻 없이 한 행동이었다.
언니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특정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다.
고양잇과 동물에게 행동의 이유를 바라다니.
그건, 몹시 추운 날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유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언니는 이내 일어나 고양이 밥통에 사료를 듬뿍 쏟아주었다.
뜻 없는 행동도 이렇게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자던 사람도 일어나게 하는 것과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나라야, 너 털 너무 날린다."
언니는 방안 여기저기 묻고 또 공기 중에 날아다니는 고양이 털을 보았다.
밥그릇에 얼굴을 묻었던 나는 혀로 입맛을 다시며 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예의 그 고양이 표정을 보던 언니는 더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스카치테이프를 가져와 길게 늘여 공중에 걸어 두고, 얼마큼은 찍찍이 부분이 드러나도록 테이프 심을 따라 말더니 바닥이나 침구 등에 붙였다 떼었다.
언니는 내가 사료를 다 먹을 때까지 그렇게 하더니 내가 그릇을 다 비우고 집을 나가자 이불을 걷어 밖으로 빼냈다.
내가 싫어하는 청소기의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나기 직전이었다.
.
.
.
제마는 현관문을 닫기 전 자신이 사는 원룸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 자기 방도 이렇게 치워놓고 산 적이 없었다.
제마가 가족과 헤어진 1년 전에는 3년의 은둔 생활의 흔적으로 쓰레기가 가득했었다.
'...나라야...'
집안을 둘러보던 제마의 눈이 고양이 밥그릇에 멈췄다.
그랬다.
저 고양이 덕분이었다.
죽지 않은 것.
죽지 않고 지금처럼,
사람처럼 살고 있는 것도.
나라는 또 어딘가로 외출하고 없었다.
"하, 어째 고양이가 사람보다 더 바쁘냐."
제마는 고양이 들으라는 듯 크게 한번 말하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오후의 햇살에 세상이 노란 황금빛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가까운 학교 등지에서 아이들이 체육활동을 하는지 꺅꺅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제마는 무심한 듯 걸었지만, 그런 아이들의 질러대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3년을 은둔형 외톨이로 살았다고 해서 제마가 처음부터, 아니 지금까지도 대인기피증이 있다는 건 아니다.
사실,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가고 동급생들이 아닌 선배들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아 과대표가 되기도 했었다.
단지 그때의 그 사건 이후. 그 이전의 자신과 다를 뿐이다.
"오셨어요!"
관장이 밖의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제마는 고개만 까딱했다.
"꽃이 참 예쁘죠?"
관장이 화단에서 줄기를 길게 뻗은 꽃 무더기를 두고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정말 꽃이 예쁘다는 기쁜 빛이 서려 있었다.
"네...."
제마가 관장의 말에 화단을 힐끗 보았다.
"에휴, 관심이 없죠, 아주..."
관장은 제마의 반응에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들이 오려면 아직 30분쯤 시간이 남았다.
제마는 아이들이 쓸 공책이며 연필 등을 준비해놓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가끔 이랬다.
제마가 자기의 상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일찍 오는 아이들이 몇 명은 있었다.
"선생님 우리, 어제 학교에서 어디 갔다 왔어요!"
그중 한 아이는 늘 제마 옆으로 바짝 다가와 수다를 떨었다.
"어, 그래...."
"맨날 제가 늦잠 자는데요, 어제는 늦잠을 안 잤다니까요. 그저께 밤에 되게 늦게 잤는데도요."
아이는 그렇게 제마가 묻지도 않은 말을 마구마구 쏟아냈다. 제마는 맞장구도 잊은 채 넋을 놓고 그 애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선생님! 애들 아직 안 왔으니까 우리 놀아도 되죠?"
남자아이들 셋이 도서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제마는 대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