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알파 켄타우리 행성에 가 본 적도 없다니 무슨 소린가? 맙소사, 이 인간들아, 알다시피 그 별은 여기서 4광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미안하지만, 너희가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가질 정성이 있건 없건,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지구) 철거 광선을 작동하라."
- <본문 중에서>
한때 사람들이 쓰던 우스개 표현 중에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관광 갔다’는 말이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황당한 언행을 하는 이에게 조롱하듯 쓰는데, 나는 때로 이걸 반어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를테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재미있게 강조하는 말로서.
<은하수를...>는 작가가 안드로메다에 갔다 와서 쓴 거 아닐까 하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처음 시작부터가 기상천외하다. 주인공이 자기 집을 철거하려는 불도저 앞에 누워 시위를 벌이는데, 관청에서는 사무실에 미리 공지했던 일이니 이제 와서 이래봐야 소용없다고 한다. 약 20여분 뒤, 모든 지구인이 외계인으로부터 비슷한 통지를 받는다. 은하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 때문에 지구를 지금 철거하겠으니 그리 알라는 것이다. 50년 전부터 알파 센타우리 행성의 사무실에 공고했었는데 그동안 아무런 민원 제기가 없었다며. 지구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없어지는 순간 외계인이 중얼거린다. ‘인정머리 없는 지구인들 같으니, 동정심도 안 생겨.’
오래 전에 이 책의 원서를 처음 접했을 때는 SF를 좋아한다는 나로서도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표지에 외계인인지 외계 행성인지 모를 동그란 것이 혀를 쑥 내밀고 ‘메롱’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도대체 정체가 뭐지?’하는 의혹은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영미권에서 대단한 베스트셀러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점점 더 커졌고, 마침내 영국의 ‘국민소설’임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해소되었다.
이 책은 원래 1978년에 영국 BBC라디오의 SF코미디연속극으로 처음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소설, 영화, 게임, 만화, 연극, 오디오북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기본 구조는 지구 소멸 직전에 우주로 탈출한 주인공이 온 우주를 여행하면서 겪는 여행담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기상천외, 포복절도, 파란만장, 상상폭주, 촌철살인... 이 소설은 지구인과 그들의 사회, 그리고 사고방식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야유를 온 우주에다 흩뿌리고 다니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이 다른 SF와 확연히 구별되는 점은 상상력의 전개 방향이 자연과학도, 미래 사회과학도 아닌 ‘풍자와 브레인스토밍’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자연과학이나 미래 사회과학적 상상력의 자극도 일정 수준 얻게 된다.) 그리고 방법론으로 구사되는 것은 ‘영국식 농담’이다.
영국 문화에는 미국과는 확실히 차별되는 어떤 품격과 절제의 미학이 깃들어 있다. 다양성, 핵심을 포착하는 직관, 반성과 대안적 발상 등에서 심지가 곧은 통찰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이 영국 소설이 지닌 미덕은 SF분야에서도 뚜렷하다. 미국 SF를 읽다 보면 은연중에 ‘SF적 상상력=자연과학적 상상력’이라는 제한된 테두리에 갇히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런 한계를 깨고 나가는 하나의 돌파구(breakthrough)처럼 기능한다. 따지고 보면 영국은 SF라는 장르를 낳고 숙성시킨, <프랑켄슈타인>이나 H.G.웰스의 나라가 아니던가. <은하수를...>는 바로 그런 전통의 훌륭한 계승자인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